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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ction: What Have We Been Reducing?

기술이 줄여온 마찰(Friction)이 인간의 학습과 판단, 인식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탐구. 개인화와 생성형 AI가 마찰을 줄이는 방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본다.

Opening

기술은 역사적으로 우리의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마차, 기차, 자동차를 거쳐 비행기까지, 이동수단의 발달은 이동이라는 목적에 드는 비용을 줄여왔다. 도서관의 카탈로그에서 검색 엔진에 이르기까지, 정보 탐색에 드는 비용도 계속 낮아졌다. 오늘날에는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무언가를 찾고 선택하는 데 드는 비용을 넘어, 생성형 AI를 통해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드는 비용까지 줄이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당연하게 치러야 했던 '비용'을 줄이는 역사였다. 시간, 노력, 불편함처럼 결과를 얻기 위해 불필요하다고 여겨져 온 것들이다. 기술 산업에서는 이러한 비용을 흔히 Friction(마찰)이라고 부르고, 기술은 이를 줄이거나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실제로 그 Friction의 상당 부분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간단한 소식을 전하려고 몇 날 며칠을 걷거나, 책 한 권을 손으로 필사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다. 좋은 기술이란 어떤 작업을 쉽게 해주는 것을 의미했고, 위대한 기술이란 수고를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기술 산업에서 "마찰이 없다"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찬사가 되었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이 없애버린 그 시간과 노력이 모두 "없어져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휴대전화가 등장하기 전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만나기로 한 약속에 상대방이 늦어 연락할 방법도 없이 기다리던 시간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보낸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던 날들을, 필름에 찍힌 사진이 현상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날들을 기억한다. 효율의 잣대로 보면 이는 명백한 불편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은 불편함보다는 애틋함 내지는 충족감에 더 가깝게 회자되곤 한다. 마치 그 기다림이 약속, 편지, 사진을 더 의미있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는 내게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을 남겼다.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더 쉽게 얻기 위해, 오랫동안 Friction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를 물어왔다. 그런데 정작 그 Friction은 무엇이었을까?

Learning

1994 년, 심리학자 Robert Bjork는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학습 과정을 더 어렵게 만드는 몇몇 조건이 당장의 성과는 떨어뜨리지만, 장기적인 기억과 다른 상황으로의 응용은 오히려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한 번에 몰아서 공부하기보다 시간 간격을 두고 공부하는 것, 같은 유형의 문제를 반복하기보다 여러 유형을 섞어서 푸는 것, 내용을 다시 읽기보다 스스로 떠올려보는 것. 모두 학습하는 사람에게는 더 힘들고, 더 느리게 느껴지는 방식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그보다 앞서 '생성 효과(Generation Effect)'라는 이름으로 관찰되었다. 1978년 Slamecka와 Graf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그냥 읽은 단어보다 단서를 보고 스스로 만들어낸 단어를 더 잘 기억했다. 같은 단어라도, 직접 만들어내는 수고를 거친 쪽이 더 오래 남았다.

이 연구들이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학습에서의 어려움은 항상 제거해야 할 비용이 아니다. 떠올리려 애쓰고, 헷갈리고, 틀리고, 다시 고치는 과정 속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학습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오히려 학습 자체를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Perception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을 마주쳤을 때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보류하는 모습을 보인다. Bystander Effect(방관자 효과)와 더불어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 위급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즉각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방관들은 다르다. 그들은 응급 상황이나 위험 상황에서도 일반인과는 다르게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소방관들이 영웅적이라고 칭송 받는 이유에는, 돌발 상황임에도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모습이 큰 축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사명감이나 개인적인 성향 차이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과의 차이를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Gary Klein은 소방관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의사결정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Recognition-Primed Decision(RPD)**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복잡한 상황에서 이론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를 하나씩 비교해 최선의 답을 계산하기보다, 현재 상황에서 익숙한 패턴을 빠르게 인식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즉, 일반인에게 낯설고 불확실하게 보이는 돌발 상황이 전문가에게는 경험을 통해 익숙한 패턴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문가와 일반인의 차이는 단순히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에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방관들은 돌발 상황에 대처하도록 이론 교육과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행동하는 동료와 현장을 직접 함께하며 동료의 행동을 관찰하기도 하고, 함께 행동하며, 성공과 실패, 그리고 후회를 거듭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이 상황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에 영향을 준다. 어떤 단서가 유의미한지, 어떤 가능성을 빠르게 떠올리는지, 어떤 행동을 우선할 것인지가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전문가의 의사결정에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주의와 지각에 관한 연구에서는 과거의 선택 경험 자체가 이후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관찰되었다. 즉, 과거의 경험은 이후의 선택에도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면 학습을 통해 형성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집합이 아닐지도 모른다.

Selection

This theoretical dichotomy, however, fails to explain a growing number of cases in which neither current goals nor physical salience can account for strong selection biases. - Top-down versus bottom-up attentional control: a failed theoretical dichotomy

기존 인지심리학과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Attention Control을 크게 top-down과 bottom-up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왔다. 현재의 목표(Selection Goal)에 따라 무엇에 집중할 것인지 주의를 자율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Top-down이라면, 외부의 특정 자극(Stimulus Salience)에 주의가 끌리는 것이 Bottom-up이다.

그런데 Awh et al.의 Top-down versus bottom-up attentional control: a failed theoretical dichotomy는 이러한 이분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선택 편향이 계속해서 관찰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논문에서 검토하는 대표적인 현상은 크게 두 가지다.

  • Selection History: 어떤 특징을 반복해서 선택해 왔다면, 이후에도 그 특징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영향은 현재의 선택 목표와 충돌하는 경우에도 나타날 수 있다.
  • Reward History: 어떤 색이나 특징과 연결된 선택에서 높은 보상을 받았다면, 이후에는 그 특징이 현재 목표와 무관하더라도 주의를 끌 수 있다. 심지어 그 특징이 현재 선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방해 자극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선택을 유발할 수 있다.

즉, 현재의 목표나 외부 자극의 물리적 특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선택 편향이 존재한다. 과거에 무엇을 선택했고, 어떤 결과를 경험했는지가 이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Awh et al.은 이를 현재의 목표(Current Goal), 과거의 선택 경험(Selection History), 자극의 물리적 현저성(Stimulus Salience)이 함께 선택의 우선순위를 형성하는 Priority Map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2026년 발표된 또다른 연구도 있다. Baron et al.는 Recognize danger, but disregard it: a mixed-methods analysis of the knowledge-action dissociation in volunteer firefighter hazard recognition 연구에서 Rescue Impulse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소방관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안전이나 주변 위험을 충분히 평가하기 전에 즉각적으로 구조 행동을 시작하려는 자동적 행동 경향을 보고했다. 소방관 자신의 의식적인 의사결정보다 먼저 구조 행동에 돌입하는 이 경향 역시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선택 구조가 의식적인 판단에 앞서 지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습을 통해 형성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집합이 아닐지도 모른다. 학습의 결과 중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선택할지를 좌우하는 선택 구조(Selection Structure)의 형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 구조는 의식적인 판단을 넘어,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떻게 행동할지에 이르는 자동적인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소방관의 사례가 보여주듯, 이러한 선택의 역사는 반복된 훈련과 실제 경험 속에서 형성된다. 그 과정에는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 결과를 다시 경험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학습 과정에서의 Friction은 단지 기억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형성하는 과정에도 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선택 구조가 단순한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는 점은 운동을 가르치는 일에서도 드러난다. 운동 선수 출신들이 초보자에게 자신의 움직임을 가르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자신에게는 너무 익숙해져 별다른 의식 없이 수행하는 동작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요소로 나누어 설명해야 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선수에게 형성된 것은 동작에 대한 설명이나 지식만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무엇을 보고 어떤 감각에 반응하며 어떻게 몸을 움직일지를 결정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습은 의식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까지 형성하며, 그 구조 전체는 단순한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만으로 타인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Friction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셈이다.

Personalization

기술은 Friction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녹음 기술의 발전은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이동 수단의 발전은 목적지까지의 이동 시간을 크게 줄여주었다. 글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전은 지식의 전파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Friction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티스트가 직접 선보이는 공연을 보러 가며, 비행기 대신 기차나 자전거를 타고, 더 나아가 일부러 걷는 여행을 선택한다. 책이 있음에도 여전히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간다.

기술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Friction을 줄이는 데 분명히 기여했다. 그러나 효율의 측면에서는 사라졌어야 할 것처럼 보였던 불편함이 오히려 다른 가치로 남기도 한다.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어도 공연은 사라지지 않았고,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어도 이동 그 자체를 경험하려는 선택은 남았다. 기존의 기술은 무엇을 효율화했는지가 비교적 분명했고, 줄어든 Friction과 그 대상이 다른 형태로 여전히 관찰되었다.

그런데 SNS 와 함께 본격화된 개인화(Personalization)는 그 성격이 다르다.

어느샌가 우리 삶에 깊게 자리잡은 알고리즘과 함께, 사용자의 사용 기록을 바탕으로 사용자가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들을 미리 선별하여 제공하는 개인화가 당연한 듯이 콘텐츠 산업에 녹아들었다. 주어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콘텐츠의 노출 순서나 추천 대상을 계산하는 기술적 수단인 알고리즘은, 어떤 콘텐츠를 우선적으로 노출하고 무엇을 최적화할 것인지에 대한 정책을 실제 시스템 안에서 구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기술 업계는 사용자가 콘텐츠를 접하고 선택하거나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까지 Friction으로 간주하고 줄이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효율화해버렸다.

개인화는 단순히 사용자의 선택을 빠르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가 콘텐츠를 선택할지 결정하기도 전에, 무엇을 마주칠 것인지부터 선별한다. 개인화에 의해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지 못한 콘텐츠는 사용자가 직접 찾아 나서지 않는 한, 선택은커녕 마주침(encounter) 자체가 발생할 기회부터 줄어든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기회가 줄어들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결국 개인화는 사용자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지나칠지, 콘텐츠에 대한 선택 그 자체를 효율화한다. 물론 이는 원하는 물건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택 구조의 형성에 기여하는 Selection History가 형성될 경험의 일부를 미리 제거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용자는 여전히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은 Selection History로 남는다. 다만 그 History는 이미 누군가의 정책에 의해 걸러진 범위 안에서만 쌓인다. 우리가 형성하는 선택 구조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보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정한 정책이 선별한 현실을 닮아간다.

이와 더불어, 줄어든 Friction이 반드시 이후의 선택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AI 연구자 Connor Leahy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데이팅 앱이 단순히 만남을 편리하게 만든 것을 넘어, 사람들이 낯선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그 행동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규범 자체를 바꾸고 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이 앱 밖의 현실에서 낯선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를 어색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으로 느끼게 됐다고 언급한다.

그가 언급한 현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경험해온 방식의 Friction이 줄어들면서, 그 Friction을 다루는 방법 역시 충분히 학습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지도를 보고 길을 찾도록 했을 때의 부담감과 거부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Friction 자체를 이전보다 더 큰 부담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아닐까.

Retro Revival

유행은 돌고 돈다. 이는 주로 패션 업계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과거에 유행했던 특정 옷의 스타일이 주기적으로 다시 유행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타나고 있는 레트로 유행의 일부는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일반적으로 유행이 돌아온다는 것은 특정 시대에 유행했던 아이템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거나, 특정 형태를 따르되 그 의미를 현재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부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코르셋이 대표적이다. 18세기 코르셋은 당시의 이상적인 자세와 실루엣을 만들기 위한 복식의 일부였고, 여성의 신체를 특정한 형태로 규율하는 의복으로 해석되어 왔다. 반면 2021년 전후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현대의 코르셋은 숨겨야 할 속옷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는 패션으로 소비되었고, 여성성과 자기표현, 주체성의 표현으로 재해석되었다. 이처럼 과거의 외형을 가져오되 현재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복고의 방식이다.

그런데 레트로 유행을 한 번 자세히 살펴보면, 통상의 유행과는 다른 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시대의 요소를 가져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분위기와 경험 자체를 다시 선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도입부에서도 언급했던 필름 사진이다. 스마트폰과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사진을 즉시 확인할 수 있음에도, 일부 사람들은 굳이 필름을 구매하고 사진을 찍은 뒤 현상을 기다리는 과정을 다시 선택하고 있다. LP 역시 마찬가지다. 수천 곡을 즉시 검색해 재생할 수 있는 시대에, 한 장의 음반을 고르고 직접 재생하는 과정이 다시 하나의 경험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때 사람들이 다시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진이나 음악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다. 사진이 현상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한 장의 음반을 고르고 뒤집는 수고처럼 결과물을 얻기 위해 사라졌던 과정까지 함께 선택하고 있다. 우리가 그립다고 느끼는 것이 그저 과거에 대한 향수 뿐인걸까? 이러한 흐름을 개인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경험을 되돌리려는 움직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잃어버린 Friction이 남아 있던 경험을 다시 선택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AI Fatigue

생성형 AI의 등장은 또다른 Friction을 줄여주었다. 우리는 AI의 도입으로 생산성(Productivity)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헤드라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연구가 하나 있다.

2025년 METR에서는 AI 사용이 작업 시간을 유의미하게 줄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16명의 숙련 오픈소스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에서는 자신이 익숙한 대규모 저장소에서 246개의 실제 이슈를 수행하도록 하고, 각 이슈에 AI 사용 허용 여부를 무작위로 배정했다.

하지만 작업 시간이 감소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오히려 작업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심지어 개발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AI를 사용했을 때 더 빨라졌다고 답했다. 사람들은 AI를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더 빨리 일을 끝내지 못했지만, 자신은 더 빨라졌다고 느꼈다.

개발자들의 실제 작업 시간을 종류별로 분류한 결과도 눈여겨 볼 만 하다.

감소한 활동증가한 활동
직접 코드 작성AI에게 프롬프트
정보 검색 및 읽기AI 결과 대기
AI 결과 검토
Idle / 기타 시간

이는 곧 직접 생산하는 Friction은 줄었는데, 생성된 결과를 판단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날 AI fatigue라고 불리는 현상의 핵심적인 작업 구조가, 비교적 초기의 코딩 AI를 대상으로 한 2025년 초 실험에서도 이미 관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빨라졌다고 느낀 경위를 추측해볼 수 있다. AI를 사용하면 실제 결과물이 눈앞에 나타나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어떤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검토와 수정이 생성 과정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무언가를 만드는 도중에도 계속 결과를 확인하고, 완성되기 전에 문제를 발견하고, 다시 수정해왔다. 생성과 검토가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생성형 AI는 이 과정의 상당 부분을 압축한다. 사용자가 직접 만들어가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일정한 형태를 갖춘 결과물을 먼저 눈앞에 제공한다. 이후 필요한 것은 그 결과물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작업자는 실제로 생산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을 절약하지 못했더라도, 결과물이 나타나는 시점이 앞당겨진 것을 작업이 빨라진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어쩌면 AI가 만들어낸 것은 단순히 더 빠른 생산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산 과정의 일부로 경험하던 Friction을 결과물이 나타난 이후의 검토 작업으로 이동시키면서, 결과물이 나타나는 속도와 작업이 완성되는 속도를 다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Friction의 변화는 오히려 새로운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앞선 논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Friction을 겪는 과정은 우리의 선택 구조를 변화시키고 상황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결과물을 빚어내는 과정에서 Friction을 점진적으로 경험하며 구조를 형성하는 대신, 이미 만들어진 결과물을 마주한 뒤 그 안에 담긴 구조와 판단의 과정을 역으로 추측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생성형 AI는 결과물을 빠르고 많이 생성할 뿐만 아니라, 구조 형성 과정에서 발생하던 Friction을 결과물이 생성된 이후의 검토와 판단 과정으로 옮겨버렸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피로의 일부가 AI Fatigue라는 이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Closing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판단하고 행동하며, 그 선택의 경험은 그 다음 판단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사람을 전문가(Expert)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전문성(Expertise)은, 전문가 자신의 경험과 선택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구조 그 자체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정관념(Stereotype) 또한 현실을 과거의 경험에 따라 인식하여 행동하는 구조이다. 전문성과 고정관념은 애초에 서로 다른 종류의 구조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전문성이라도 자신의 판단을 형성한 구조를 더 이상 수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구조를 현재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고정관념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구조는 전문가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구조를 바탕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무엇에 주목할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구조 덕분에 현실을 이해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구조가 허용하는 방식으로만 현실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도 이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구조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구조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형성된 구조가 현실과의 접촉 속에서 계속 수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익숙한 판단을 가능하게 했던 경험이 새로운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가릴 수도 있다. 기존의 구조와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Friction은 바로 그 간극이 드러나는 순간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Friction을 줄이는 기술은 단지 우리를 편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구조가 굳어지는 것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 구조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같은 매체와 공간, 주제를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판단이 마주치고 충돌할 기회가 있었다. 틀렸더라도 함께 틀릴 수 있었고, 그렇기에 서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논쟁할 수 있는 공통의 바탕도 존재했다.

개인화와 생성형 AI는 그 기회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화는 우리 각자의 구조가 각자에게 맞춰 선별된 현실 속에서 형성되게 한다. 구조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굳어지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공유하던 바탕은 조금씩 사라진다.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더 큰 Friction으로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성형 AI는 또 다른 것을 줄인다. 개인화가 구조가 형성되는 현실을 선별한다면, 생성형 AI는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 자체를 건너뛰게 한다. 우리는 결과물을 얻지만, 그 결과물을 만들며 겪었어야 할 Friction과 그 속에서 형성되었어야 할 구조는 얻지 못한다. 결과물은 공유되지만, 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판단 구조까지 함께 공유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비용이라고 간주하며 줄여왔던 Friction은, 단순히 목표 달성을 지연시키는 요소라고 단정 짓기에는 부족했다. 찰나의 고민과 순간의 머뭇거림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크고 작은 Friction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 그리고 그 선택들이 쌓여 형성된 구조는 우리가 현실을 접하며 무엇을 우선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만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Friction을 대하는 타인의 노력을 통해 가치를 판단해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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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October 10, 2026
Tags
Artificial IntelligenceFrictionLearningPerceptionPersonalization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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