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insic Loneliness
Epistemic Privacy 로부터 유발되는 존재론적 공포와 이를 극복해내기 위해 발달한 인간의 사회성
이 글은 다음의 시리즈에 포함된 글이다.
- Software Architecture: A Mirror Of Organization
- The Three Discovery Layers of Organizational Dysfunction
- The Great Individuals: Masking Deficiencies
- Perception Overlap
- Intrinsic Loneliness
Prerequisites
본격적인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이 글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조건들은 주장이라기보다, 우리가 이미 일상적으로 전제하고 행동하고 있는 인지적 사실들이다.
P1: Epistemic Privacy
이전 글에서도 다뤘던 내용으로, 개인의 고유한 경험은 온전히 공유할 수 없으며,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내용이다.
P2: Perception of Humanity
인간은 어떠한 현상에 대해 인간성(humanity) 또는 의도적 주체성(agency) 을 지각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타인의 정신 상태 — 의도, 신념, 욕구 — 를 추론하는 인지 능력인 Theory of Mind 에 근거한다. Theory of Mind 는 인간이 관찰된 행동이나 현상을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행위자의 산물로 해석하도록 한다. 이러한 능력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인지 메커니즘으로, 인간이 특정 현상에서 인간적 의도나 주체성을 감지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P3: Finiteness of Cognitive Resources
학습이나 문제 해결, 주의력, 의지력, 자기 통제 등의 작업에는 인지적 자원이 소모되며, 이 자원은 한정적이다. 이는 뇌과학적 및 생물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으로, 인지 자원을 소모하는 것은 곧 신체의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말과 같으며, 뇌는 이 에너지의 소모를 줄이는 방향(Heuristic)으로 진화했다.
Ontological Terror
이전 글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P1 에 따라, 인간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인간은 모두 인지적 소외(Cognitive Alienation) 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소통은 물리적 설명과 현상적 경험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좁혀가는**(Cognitive Alignment) 과정적 행위** 이다. 이는, P2 와 연결되어, 개인이 감각한 그 의도가 비슷함을 확인하는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소통할까? 태생적으로 결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를 타고 났는데, 우리는 왜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고,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걸까?
개인의 경험이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철저히 고립된 상황을 가정해보자.
방금 무슨 소리였어?
누군가와 함께 숲 속을 걷던 와중, 천둥 소리와 같은 어떠한 분명한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는 함께 있던 사람에게 이 경험을 확인한다. 언어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지 같은 행동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고, 질문에도 시큰둥하다면 과연 그 들었다는 경험은 어떻게 느껴질까?
개인이 인식한 그 소리는, 실재하는 현상인지 혹은 개인의 망상에 불과한지 알 수 없게 된다. 단편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그 인식을 단순히 개인의 착각이라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검증 불가능한 경험이 반복된다면, 개인은 점차 어떤 경험이 실재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인식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나아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하게 되고 만다.
이는 존재론적 공포(Ontological Terror) 이다.
이는 단순한 정서적 불안이나 미지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존재론적 공포란, 개인이 자신이 지각한 경험이 현실에 속하는지 여부를 더 이상 판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인지적 경보 상태이다. 무엇이 위협인지, 무엇이 신호인지, 무엇이 의미 있는 정보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학습도, 예측도, 행동의 근거도 불투명해진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현상에 대처하기 이전에 그 인식이 현실인가에 대한 확인을 먼저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인지 체계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기 이전에, ‘그 경험이 실재했는가’를 우선적으로 확인하는 셈이다. 존재론적 공포는 행동에 대한 판단보다 앞서는, 행동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현실 판별 능력—즉, 자신의 인식이 세계에 닿아 있다는 확신—이 무너졌음에 대한 공포이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 — 원피스(One Piece)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이 유명한 대사는 대개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서사적 명예나 윤리적 유산의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이를 존재론적 공포(Ontological Terror) 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문장은 수사적 은유가 아니라 인간 주체가 유지되기 위한 인지적 필수 조건을 가리키는 사실적 진술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잊혀진다’는 것은 사회적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상실을 의미한다. 자신의 경험이 더 이상 그 누구의 인식에도 닿지 못하고, 상호주관적 현실을 형성하지 못하는 순간, 개인은 인식 주체로서의 발판을 잃는다. 이는 단순한 소외나 고립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의 붕괴이다.
존재론적 공포는 행동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현실)가 무너질 때 발생하는 공포이며, 그 강도와 성격에 있어 죽음의 공포와 동급, 혹은 그와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곧 ‘죽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Intrinsic Loneliness
Humans are highly social — Wikipedia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인간을 설명하는 자명한 정의처럼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본 존재론적 공포(Ontological Terror) 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명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성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성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 타인과 연결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즐거움이나 협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인식이 '망상'이 아님을 증명받기 위한 '인식론적 생존(Epistemic Survival)' 을 위해서다. 타인이 "너도 그것을 보고 있다"라고 확인해 주는 순간, 개인의 사적인 감각(Qualia)은 비로소 상호주관적인 현실(Intersubjective Reality) 로 격상되며 존재의 닻을 내리게 된다. 즉, 소속감이란 단순히 집단에 포함되는 느낌이 아니라, 나의 현실감이 타인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안정감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회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우리는 외로움을 타고났기 때문에 사회성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외로움을, 이 존재론적 공포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해왔다.
Loneliness Epidemic
Countless voiceless people sit alone every day and have no one to talk to, people of all ages, who don't feel that they can join any local groups. So they sit on social media all day when they're not at work or school. How can we solve this? — Hacker News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사람들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외로움을 호소한 적도 없었다. 이 현상은 특정 연령이나 계층,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생과 직장인, 도시와 농촌, 사교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 모두에게서 나타난다. 소통이 넘쳐나고 상호작용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이 외로움은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요 증상들은 다음과 같다:
- 만족감 없는 장시간의 소셜 미디어 사용
- 주변 이웃과 유대감을 형성하거나 유지하는 일의 어려움
-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길 원하면서도 정작 말하기를 주저함
- 그 자리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참여하고 있지는 않는 듯한 기분
이러한 증상들은 흔히 공동체 의식의 결핍, 사교 기술의 부족, 혹은 시간 부족과 같은 사회적·심리적 문제로 치부되곤 한다. 그에 따라 제시되는 해결책들 또한 더 많은 플랫폼, 더 많은 행사, 더 많은 연결 기회처럼 '상호작용의 양을 늘리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외롭다고 말하고 있다.
그 외로움은 현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개인의 성격, 노력, 혹은 사회성의 실패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God
All knowing, all seeing.
현대 인류는 이 구조적인 외로움과 존재론적 공포를 처음 겪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이 공포는, 인간이 인식 주체로 존재해온 순간부터 항상 함께 존재해왔다. 중요한 차이는, 우리는 이 공포를 항상 직접 마주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경험을 전적으로 타인에게만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인간은 자신의 인식과 행위를 항상 ‘누군가에게 목격되고 있다’는 전제 속에 위치시켰다. 그 누군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일신론(monotheism)에서의 신(God) 은 전능(Omniscient)한 존재임과 동시에, 전지(Omnipresent)한 목격자(Spectator)였다. 인간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은 언제나 신의 인식 속에 놓여 있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경험은 결코 완전히 고립되지 않았으며, 항상 외부의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가 유지되었다.
신은 존재론적 공포를 완충하는 거대한 인식론적 장치였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이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실재한다” 는 확신을 신에게 위임할 수 있었다. 신은 인간 개개인의 유한한 인지 자원(P3)을 대신 소모해주는, 무한한 외부 인지 자원이었던 셈이다.
이 구조 속에서, 개인은 매 순간 타인과 인식을 정렬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회적 소속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존재의 최종적인 닻은 인간 사회가 아니라 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존재론적 공포에서부터 벗어난 게 아니라, 신에게 외로움을 전가하고 있던 것이다.
Post God Era
신은 죽었다. — Die fröhlich Wissenschaft (188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니체의 이 선언은 흔히 도덕과 가치의 붕괴에 대한 선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를 존재론적 공포(Ontological Terror) 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문장은 윤리적 진단이 아니라 인식론적 사건에 대한 보고에 가깝다.
‘신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경험과 행위를 항상 목격하고 확인해주는 외부 인식 주체를 상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경험은 더 이상 자동으로 상호주관적 현실과 연결되지 않으며, “이것은 실재한다”는 최종적 보증을 잃었다.
신이 존재하던 구조에서,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매번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신은 언제나 보고 있었고, 알고 있었으며, 기억하고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개인의 인식은 세계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신에게 떠넘겼던 그 역할은 인간의 몫으로 돌아와버렸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나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내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닦아버릴 수 있는 스펀지를 주었단 말인가?
지구가 해의 궤도에서 풀려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지구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나?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진하고 있나? 측면으로 가고 있나? 직진하고 있나? 아니면 모든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가?
아직도 위쪽이 있고 아래쪽이 있나?
우리는 끝없는 허공을 방황하는건가? 허공의 흐름을 느끼지는 못하면서?
더 추워지는 거 아닐까? 계속해서 저녁만 반복되는거 아닌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 Die fröhlich Wissenschaft (188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니체는 일찍이 이를 알아채고, 개인(übermensch)으로서 이를 극복해내려고 했다. 그가 놓친 것은 단 하나, 인간의 인지 자원이 유한하다(P3)는 것 뿐이었다.
Experiential Thinning
기술은, 인간의 물리적 노동 강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한계(P3)를 극복하기 위해 인지적 노동(Cognitive Offloading)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기술은 인지 부하를 겪는 과정을 우회함으로써 소모되는 인지 자원을 아껴주지만, 필연적으로, 인지 부하를 겪는 그 과정, 즉 경험 그 자체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는다.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그 결과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 비슷한 인지 부하를 겪을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 앨범 정말 좋지.
2000 년 대 이전, 이 한 문장은 여러가지 비슷한 경험을 함축하고 있었다. 앨범의 발매 소식을 찾아보고, 가까운 음반 판매점까지 이동하고, 앨범 재고를 물어보는 등, 앨범이 좋다는 말 한마디에는 그 판단을 내리기까지 겪은 수고로움, 그 수고를 감수하며 겪은 감정들 등이 모두 녹아있었다. 그리고 그 수고로움 덕분에, 앨범의 구매는 비교적 신중한 결정이었다. 우리는 이 한 마디 감상평으로, 그 사람이 겪었을 경험을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한 문장으로부터는 구체적인 경험을 유추하기 힘들다. 앨범 자체에 매력을 느낀 것인지,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접했는지, 심지어는 어떤 플랫폼에서 들었는지조차.
소통은 타인의 경험을 유추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은 소통의 재료로 사용될 경험의 희박화(Experiential Thinning)를 초래했고, 사람들 사이의 소통에 필요한 비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통은 인지 부하를 일으키는 작업이 되어버렸으며, 사람들은 소통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기술은 기어코 소통을 효율화의 대상으로 규정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기술이 간과해온 결정적인 전제, P2(Perception of Humanity) 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타인과의 연결을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나 수신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 메시지나 행위를 접할 때, 그것을 물리적·기계적 사건으로 처리하기보다, 의도를 가진 주체가 만들어낸 산물로 해석한다. 이때 인간은 상대방이 무엇을 말했는가뿐 아니라, 그 말에 어떤 의도와 인지적 자원이 투여되었는가를 함께 지각한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실재감은, 상대가 나를 위해 자신의 한정된 인지 자원을 기꺼이 소모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기술이 소통을 '효율화'하면서, 이 증거들 또한 옅어졌다.
존재의 닻이자 실재의 보증이었던 신을 우리 손으로 떠나보낸 이후, 경험의 실재성은 오직 인간 사이에서만 검증되어야 하는 문제가 되었고, 기술은 그 검증에 필요한 재료를 점점 더 고갈시켰다.
The Loop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조직에서 일(소통)을 하는 데 필요한 인지 자원은 늘어났으며, 현대인들은 이에 지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일터에서 인지 자원을 더 많이 소모하게 되었고, 일상에서 그 자원을 아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참여하기를 꺼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뇌는 Short-form, brain-rot 처럼,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면서도 보상(자극)을 받을 수 있는 컨텐츠들을 선호하며 Popcorn Brain 이 되어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의 조회수, 좋아요 등의 표면적인 반응으로 자신의 경험을 검증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인식의 중첩에 대한 시도 자체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경험을 유추하는 작업은 우리에게 더 이상 짊어지고 싶지 않은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표면적인 검증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았나보다. 인지적 소외(Cognitive Alienation)는 우리 모두가 겪게 되었고, 외로움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Outro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외롭다.
외롭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때 인간은 이 외로움을 신에게 맡길 수 있었다.
신은 우리의 경험을 목격해주었고, 그것이 실재함을 보증해주었다.
그러나 신은 떠났고,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이제 우리의 경험이 실재임을 확인해줄 수 있는 것은, 서로뿐이다.
